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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유용화의 오늘의 눈]
등록일 : 20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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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화 앵커>
지난 3일 광주에서는 91주년 광주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열린 기념식은 2018년부터 정부 주관으로 격상됐으며, 지난 2년간 학생독립운동 유공자 158명을 발굴, 포상 해왔습니다.

광주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 간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 여학생들을 희롱하자,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벌어진 청년 민족 감정의 폭발적 운동 이었습니다.

이후 한국 학생들은 부당한 일제의 처사에 항거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11월 3일 광주에서부터 시작된 항일 투쟁으로서의 광주 학생 독립운동은 이듬해인 1930년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3월까지 계속된 학생 독립운동에는 전국 방방곡곡 320개 학교와 재학생의 60%인 5만 4천여 명이 참여 하였습니다.

서울의 경복고와 경성제1고보, 중동고 및 함흥, 원산, 신의주, 평양, 개성은 물론 남쪽의 진주, 대구, 부산, 제주까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1천 642명이 체포되었고, 퇴학 582명과 무기정학 2,330명이 발생한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 민족 항쟁 이었습니다.

일제의 폭압적 상황에서 용감하게 항거한 학생들의 투쟁은 이후 항일 민족운동에 다시 불을 지피는 기폭제로 작용하여, 국내에서는 신간회 등 민족 독립운동이 더욱 더 활발하게 전개됐으며, 해외에서도 임시 정부의 활동에 상당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1932년 상해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가 1930년 국내에서 광주 학생 운동을 목격하고 독립 운동에 투신코자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가게 됩니다.

한국의 학생 운동은 1929년 광주 학생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일제 하 학생 운동의 용감하고 희생적인 정신은 해방 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독재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 전두환 군사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도 한국의 학생 운동은 희생적이고 선도적인 모습으로 끈질기게 권위주의 정권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아마도 30여 년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한 학생운동의 역사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할 것입니다.

4월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학생운동은 광주 민주화운동, 그리고 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주의 완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날 기념식에 참석한 정세균 국무총리는 "그 정의로운 함성이 억압과 압제를 뚫고 일어서 대구 2.28, 대전 3.8 민주 의거를 거쳐 4·19혁명과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5.18 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 2017년 광화문 촛불 혁명으로 면면히 계승되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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