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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0주년 [유용화의 오늘의 눈]
등록일 : 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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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화 앵커>
6.25 전쟁은 1991년 그 비밀 자료들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 발발 원인에 대해 논란이 많았습니다.
김일성 북한 정권의 국토 완정론에 따른 남침설과 이승만 정부의 북침설, 또 미국의 음모와 유도에 따라 북한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하는 남침유도설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멸망 후 소련의 전쟁 관련 기밀문서 등이 공개되었죠.
북한이 소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킨 것이 밝혀졌습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침을 제안했지만,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에서는 북한의 남침을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북한의 준비부족과 남침이 결국은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 3월 30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재차 방문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면 3일 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으며, 미군참전이 어렵다고 설득합니다.
결국, 스탈린은 북한이 위태로워질 경우 중국공산당이 지원한다는 승인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남침을 승낙하게 됩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남침이 감행되었고 이틀 뒤인 27일 미군이 지원하게 되며, 유엔군이 파병됩니다.
또한, 10월 19일에는 대규모의 인민해방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6.25 전쟁은 국제적인 내전으로 비화하게 되고 그 전쟁의 참혹한 결과는 우리 민족이 온통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4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500만의 전재민, 그리고 천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남한경제의 42%가 파괴되었고, 북한 역시 8,700여 개의 공장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북한 전역에는 1평방 킬로미터 당 평균 18개의 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한민족은 남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야만과 증오는 전 국토에 물들었습니다.

또한, 남북은 분단의 고착화와 함께 본격적인 체제 경쟁에 나서게 되었고 남한은 반공 국가의 보루로서, 북한은 사회주의 유일 독재체제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분단체제에 살고 있으며 한반도는 아직도 1953년 맺은 휴전협정의 지뢰밭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외세에 의해 갈라진 분단,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극도의 모험주의적 행동에 따라 발발된 민족전쟁.
그리고 희생된 죄 없는 국민들.
그 상처와 아픔은 언제쯤 완전히 치유될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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