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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색출 그리고 억울한 죽음
등록일 : 20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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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사건의 배경 및 특성 소개
- 영암은 덕진면 영보마을, 군서면 구림마을 등 유서 깊은 반촌 마을들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및 해방 후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 1949년 영암보도연맹이 결성되는데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되어 집단 학살되었으며 영암은 1950년 7월 23일 군경후퇴 후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 9.28 수복 후 영암지역 수복작전이 시작되자 인근지역의 지방좌익들이 군서면 월출산, 금정면 국사봉 등으로 입산했고 군경은 이들을 토벌하고 영암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여러 마을을 불태우고 수많은 주민들을 집단 살해하였다.
- 수복 후에도 빨치산 잔당의 처리, 부역혐의 등의 명목으로 민간인 희생은 계속되어 영암은 영광과 함께 한국전쟁시기 민간인 희생이 가장 컸던 지역으로 꼽힌다.

민간인 희생 유족, 신중재(72) 덕진면 노송리
- 삼촌 보도연맹 희생, 부친 부역혐의 희생. 신중재는 現영암유족회장.
#삼촌 신부길(22)이 해방 후 마을에 자주 출몰하던 반란군을 도와준 일이 있는데 이후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발발 직후 영암경찰서에 구금, 금정면 차내마을로 끌려가 총살됨. 영암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중순 이후 두 번에 걸쳐 집단총살되었음.
# 부친은 군경이 마을을 수복한 이후 신부길의 형이라는 이유로 덕진지서로 연행 돼 1.4후퇴 직전 전황이 다시 불리해지자 다른 구금자들과 함께 신북면 한새다리에서 총살.
# 교직에 있으며 오래도록 요주의대상으로 감시받아야 했던 신중재는 부친의 희생지조차 몰랐으나 당시 부친의 시신을 묻어준 이로부터 사건발생 68년 만에 진실을 듣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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