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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광복군총사령부 복원 [유용화의 오늘의 눈]
등록일 :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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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화 앵커>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총사령부 건물이 복원됐습니다.
중국을 방문 중에 있는 이낙연 총리가 오늘 복원식에 참석했는데요.
중국정부의 협조에 감사표시를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지는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구요.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5일 광복군 사령부 선언문을 발표하고, 9월 17일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창설되는데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작탄의거'의 공이 컸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애국단 소속이었던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 단장이었던 김구 선생의 조력과 지시를 받아 1932년 4월 29일 역사적인 쾌거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날 상해 파견사령관 사라카와 대장은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며, 식장에 참석한 왜인 문무대관들과 전승 축하객 왜인 수십명이 살상을 당하거나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4월 29일 전승절 행사는 일본이 상해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홍구공원에서 젊은 조선의 청년이 홀홀단신으로 상해를 침략한 일본군 지도자들을 처단하자, 가장 놀라고 반가워한 사람들은 4억 인구의 중국인들이었습니다.
이후부터 임시정부는 중국국민당 정부로부터 자금과 물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장개석 총통은 김구 선생을 만나 광복군 창설 지원을 약속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상의 한중군사동맹이 맺어진 것이며,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죠.
한국광복군은 처음에는 장개석 총통의 특허 때문에 중국군의 일부로 창설됩니다.
그러나 1944년 김구 주석과 임정요인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임정 직속 한국광복군으로 전환됩니다.
당시 지청천 장군은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해산 당해 서울시가전을 벌였던 8월 1일이 광복군 창설일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1942년 광복군과 기타 한국인 항일유격대는 10만 명에 달했고, 1944년 일본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한반도북서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던 한인유격대는 1만 6천명이었습니다.
광복군의 공식인원은 약 3천명이었습니다.
광복군 제2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은 미국 OSS와 함께 한국침투 특수부대 훈련도 실시했었죠.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와 광복군사령부가 있었던 중국 충칭과 우리는 역사적인 동질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인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로 전락했던 30여개 국가 중 임시정부와 군대를 소유했던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했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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