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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9년 [유용화의 오늘의 눈]
등록일 : 201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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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화 앵커>
오늘은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한국을 병탄한 경술국치 109년이 되는 날입니다.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먹은 경술 8적.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만희가 다시 생각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 병합조약을 공포했습니다.

8월 22일 조인 절차를 마무리 지었지만, 한국 국민의 반발을 고려해 서울로 병력을 이동시킨 뒤 29일 뒤늦게 발표 했습니다.

그러나 한일 병합조약은 명백한 불법입니다.

순종 황제의 비준 절차인 서명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끝까지 서명 날인을 거부했고, 일본과 친일 대신들이 1907년 7월, 고종 황제 강제 퇴위 때 빼앗은 행정 결제용 옥새만을 날인 했을 뿐입니다.

국제법상 국가 간의 조약에 필수적인 국새와 순종의 칙유 서명은 조약에 보이지 않습니다.

즉 당시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합법적인 식민지가 아닌, 일본이 총과 칼을 앞세워서 한국을 무력으로 병탄 점령한 것입니다.

경제보복 이유조차 정직하게 밝히지 않는 일본의 후안무치,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고종은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등 밀사를 파견해 국제 사회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렸으며, 1909년 독립 의군부 소속인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또한 1907년 대한 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 당하자 국군과 의병 부대는 국민군으로 편성돼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국민군은 국내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뿐만 아니라, 만주로 근거지를 이동해 독립군으로 대열을 정비해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일본과의 국민전쟁은 3.1운동과 독립군 투쟁, 광복군 창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지며,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으로부터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승인받습니다.

오늘이 비록 '경술국치일' 이라고 불릴지라도, 한국 국민은 결코 일본에게 순순히 항복하거나 나라를 내어 준 것이 아니라, 1894년 갑오왜란부터 시작해, 1945년까지 50여 년간- 지속적인 투쟁과 전쟁을 벌였으며 그 성과로 1945년 광복을 맞이했음을 우리는 역사 앞에서 확인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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