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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더욱 그리운 목소리 [음악이 흐르는 세상]
등록일 : 200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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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음악이 흐르는 세상>시간입니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더욱 그리워지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좀 더 많은 노래를 들려주기 바랐지만, 11월에 팬들의 곁을 떠나버린 가수들인데요.

오늘의 주제, 화면으로 함께 보시죠.

네, 오늘은 ‘11월에 더욱 그리운 가수들’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나와 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화면을 보고 놀라신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Q1> 우리의 사랑을 많이 받은 가수들이 공교롭게도 11월에 팬들 곁을 떠나셨네요?

A1> 김현식, 유재하, 김성재(듀스), 김정호, 배호, 차중락, 강병철(삼태기) 등등. 이들은 가진 재능을 다 풀어내지 못한 채 너무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게다가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사실은 이들 요절 음악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11월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김현식 1990년 11월 1일

유재하 1987년 11월 1일

김성재 1995년 11월 20일

김정호 1985년 11월 29일

배호   1971년 11월 7일

차중락 1968년 11월 10일

훌륭한 가수들을 잃은 것이 우리나라 가요계나 팬들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Q2-1> 이 시간 그 분들의 음악과 삶에 관한 이야기 들어보면서. 함께 추억하는 시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만나볼 분은 누구신가요?

A2-1> 66년 신장염이 발병했다. 하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에서 취입할 때는 한 소절 부르고는 털썩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날의 신곡이 바로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그가 노래한 용산의 입체교차로는 94년 철거되고 배호 노래비만 남는다. 71년 병세가 악화되자 병상에서 '0시의 이별'과 '마지막 잎새'를 녹음했다. 헐떡이는 숨결과 끓는 가래가 그대로 느껴지는 최후의 노래다. 공연 출연도 했다. “죽어도 노래하다 죽겠다”면서. 음악만 틀어놓고 무대에 그대로 서 있던 때도 있었다. 그해 11월 7일 배호는 운명했다. 병상 곁에는 1년 동안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던 일곱 살 연하의 여성이 있었다. 죽기 하루 전 배호는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건네주면서 “안 가겠다”고 울부짖는 그녀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1일 예총회관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소복 입은 젊은 여인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섰다. 그가 떠난 지 38년. 노래방에선 여전히 배호 노래가 흘러나오고 인터넷에는 수백 개의 팬클럽이 활동하고 있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을 기리는 장충단 배호가요제도 매년 열린다. 배호 노래 중에 가사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31곡, 안개가 낀 것은 13곡이라고 한다. 가수 생활 5년에 300여 곡을 남긴 열정과 투혼의 삶.

Q2-2> 가요계의 전무후무한 가창력으로 인정받았던 가수 ‘배호’씨의 노래를 들어보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화면 함께 보시죠.

A2-2> 배호씨가 떠나신지 벌써 30여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노래는 이렇게 우리 곁에 남아있네요.

Q3-1> 이렇게 노래로만 우리 곁에 남은 분으로 유재하씨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A3-1> 대학 재학 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86년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였다. 유재하(1962-1987)는 검열, 사전심의, 건전가요를 불러야 하는 의무로 기억되는 1980년대의 삭막한 대중음악 시장 속에서 단 한 장의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1987)만으로 한국 대중음악사를 바꾸었다. 단출한 연주, 기교나 가창에 구애받지 않는 꾸밈이 없는 창법은 포크 장르의 방법론을 한국 대중음악에 접목한 새로운 시도였다. 이는 이후 이영훈(이문세), 김광석, 하동훈, 박학기 등으로 이어지며 한국 발라드의 가장 유려한 형식으로 계보를 이어나갔다.

Q3-2> 그럼 유재하씨의 그리운 목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화면 함께 하시죠.

Q4> 유재하씨 같은 경우는 스물다섯 살이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단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기고 떠나셨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큰데요.

A4> 요절한 아티스트들에 대한 아쉬움 한창 피어날 젊은 나이의 죽음, 이른바 요절은 너무나 안타깝다. 예술부문에서 대부분의 요절 아티스트가 비범한 천재라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과 탄식을 부른다.

1987년 8월에는 자신의 데뷔앨범이자 유작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한다. 이 음반은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 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 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사망 후 일반인들과 음악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갔으며,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스물 다섯해라는 짧은 삶에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겼지만 '발라드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김광진, 신승훈 등의 후배 음악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유재하를 기리는 음악대회는 1989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만약 유재하가 살아있었다면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특히 발라드의 역사에 있어 큰 변화를 가져왔을 거라 말한다. 비록 한 장의 유작 앨범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의 음악 전부이지만, 그만큼 우리 한국 음악계에 전해진 그의 음악적인 역량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사망 후 유재하의 아버지 류일청씨는 아들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수익과 성금을 기탁하여 '유재하 음악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장학회 주관으로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1회 대회 수상자인 조규찬을 필두로 유희열, 고찬용, 김연우, 나원주, 정지찬 등이 대표적이다.

Q5-1> 그런데 유재하씨가 떠난 11월 1일에 또 한 명의 걸출한 아티스트가 우리 곁을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생깁니다.

자막> ‘가객(歌客)’ 故김현식

A5-1> 지난 1990년 34세의 나이로 요절한 가수 김현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9년이다. 고 김현식은 지난 1980년 1집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데뷔했으며, '내 사랑 내 곁에' '비처럼 음악처럼' '그대와 단 둘이서' '사랑했어요' '골목길' 등의 수많은 히트곡으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고인의 뛰어난 음악적 감수성을 시기라도 하듯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 그는 지난 1990년 11월1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 후 발표된 6집에 수록된 '내 사랑 내 곁에'가 1991년 크게 히트, 사망 후 1년이 지난 해 연말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Q5-2> 김현식 씨의 노래 아직까지도 아끼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음악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Q6> 김현식씨를 그리워하는 팬들도 많지만, 김현식 씨와의 남다른 인연으로 잊지 못하는 가수 분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A6> 봄여름가을겨울: 1985년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와 함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1986년 이들의 연주로 녹음한 3집 앨범을 발표한다. 신숭훈: 가수 신승훈은 유재하처럼 모든 곡을 작사 작곡 편곡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꾸었고, 김현식처럼 능란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가 되고 싶어 했다. 기이하게도 신승훈은 김현식이 죽은 날인 1990년 11월 1일에 데뷔했다. 그런 연유 때문에라도 그는 진정한 싱어송라이터와 영혼의 가수를 숙명으로 여겨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상: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끝까지 완성한 노래인 '여름밤의 꿈'을 듣고 김현식이 바로 3집 수록곡으로 부르게 되며 작곡가로 데뷔를 했다. 그리고 이승철과 김장훈 등.

벌써 아쉽게도 마지막 노래를 들어봐야 할 시간인데요.

Q7-1> 젊은 세대도 많이 기억하고 있을, 그룹 ‘듀스’의 김성재씨입니다.

A7-1> 듀스는 우리 나라에 본토 힙합의 정수를 전한 팀으로 평가받는다. 김성재와 듀스는 지금도 힙합 지망생들에게 신화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듀스는 1990년대 초반 X세대의 아이콘이었다. 특히 열렬 매니어층을 거느린 청춘 스타였다. 그러나 김성재의 사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팬들은 지금도 재조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이 그를 부활시킨 듯 보인다. 최근 한 청바지 업체가 생전 그의 사진을 이용해 CF를 제작한 것도 뜨거운 추모 열기 때문이다. 듀스 헤체 후 발표한 김성재의 첫 번째 솔로 음반이자 마지막 유작이 되어버린 음반 <말하자면>은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을 예시하는 곡제목(마지막 노래를 들어줘)들로 인해 그의 죽음을 더욱 아쉽게 하기도 했다. 듀스의 멤버인 이현도는 김성재의 사망 후 발표된 앨범 <DEUX FOREVER(베스트 앨범>에서 듀스시절의 곡들은 물론 김성재의 솔로음반에 수록된 "말하자면"과 원래 솔로음반의 타이틀로 예정 되었으나 녹음이 완성되지 않았던 "사랑두려움"까지 수록된 모든 곡을 재편곡하여 친구인 김성재의 목소리와 새로 녹음된 이현도 자신의 목소리를 합치는 정성스런 작업을 하여 그들의 마지막 추억을 기록하였다.

Q7-2> 1990년대 초반 신세대의 아이콘이었죠.

듀스의 노래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떠오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음악이 흐르는 세상’ 오늘은 11월에 더욱 그리운 가수들에 관한 이야기 들어봤습니다.

말씀 나눠주신 임진모 대중문화평론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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