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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피겨 100년, 그 열정의 발자취 - 이해정 (대한빙상경기연맹 고문)
등록일 : 201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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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이해정>


-지난 2002년.

한국 피겨역사에 혜성과 같이 등장해 세계 피겨무대를 석권한 피겨천재 김연아.

그러나 김연아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한국 피겨의 산증인들이 오랫동안 땀흘려 노력한 결과가 만들어낸 성과인 것이다.


-한강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피겨 및 스피드 경기가 진행됐으며 오후 2시에는 이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장엄한 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한강에서 열린 동계 빙상대회.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페어스케이팅을 선보인 이혜정.

그러나 당시에는 남녀가 손잡고 연습을 하는 것이 풍기문란으로 몰렸던 시대.

한국 최초의 실내스케이트장인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을 만들어낸 숨은 주역.

우리나라 최초의 페어스케이팅 선수로 한국 피겨역사와 함께한 산증인 이해정 대한빙상경기연맹 고문을 초대해 우리나라 피겨의 역사와 빙상인으로서의 70년 인생을 들어본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한늬우스의 그때 그 사람 고수웅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과 같이 등장해 온 국민의 관심을 쏠리게 한 세계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의 영광은 개인의 각고의 노력이 물론 있었지만 한국 피겨 역사 100년이 만들어낸 열정과 땀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한국 빙상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페어스케이팅 선수이자 피겨스케이팅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해정 대한빙상경기연맹 고문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제가 뵈니까 빙상을 해서 그러신지 굉장히 건강해 보이시는데.

우리나라 스케이팅.

그러니까 빙상의 역사가 이렇게 100년이나 됐어요.


-그렇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알고 있을 때는 1904년에 YMCA 선교사로 왔던 질레트라는 분이 스케이트를 보급했다.

그 스케이트를 현동순 씨라는 분한테 귀국할 때 양도를 했다는 걸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랬는데 피겨 100년사를 편집하다 보니까 옛날 황성신문에 1896년에 소위 요새 얘기하는 비원 안의 연못에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앞에서 미국 공사하고 또 제중원 지금 세브란스가 되죠.

거기 의사 내외들이 그 앞에서 시범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해정 선생님도 페어스케이팅 부문 선수권을 갖고 계신데.

처음 스케이트하고 인연은 어떻게 해서 맺게 되셨나요?


-집에 형님이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시다가 겨울방학에 나올 때 스케이트를 선물로 사다준 것이 인연이 돼서 8살 때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스케이트를 안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적으로 보면 형님이 유학하시고 스케이팅을 타실 정도가 되니까 아주 여유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그때는 지금처럼 스케이트 링크장이나 이런 게 없잖아요.


-그럼요.


-그럼 밖에서 전부 얼음을 지치고 해야 하는데 강물을 가둬놓고 그런 데서 탔습니까?


-옛날에는 서울에서 스케이트를 탈 때는 청량리예요.

지금 청량리 시장이 있는 그 일대가 전부 미나리논입니다.


-논밭.


-겨울에 미나리논이기 때문에 물이 있죠.

그게 얼면 대개 그때는 매스컴이 라디오밖에 없으니까 다음 날에 기상예보 할 때 내일은 첫 추위가 와서 얼음이 얼 거다 하는 예보가 나오면 스케이트를 꺼내서 밤새도록 손질을 해서 첫 차 전차를 타고 청량리까지 가는 겁니다.

그래서 먼동이 컴컴할 때 시작이 돼서 해가 돋으면 얼음이 두껍게 얼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타려고 그러다가는 빠집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개 잡았다고 그런 얘기들을 들었죠.


-지난 13일부터 한강특설링크에서 열린 시민빙상경기대회는 150명의 선수들이 참가해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금년 겨울 들어 첫 빙상경기인 이 시민경기대회에서는 학생부, 일반부 등 14개 종목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됐는데 특히 이날 육군팀과 해군팀의 모범경기는 위세를 띄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초창기 배우실 때 아무래도 서툴고 그랬을 텐데 스케이트를 이일 선생님한테 배우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제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뵀지만 원래 저희 형님도 스케이트를 좀 타시던 분이에요.

그래서 형님 따라서 스케이트를 배우다가 제가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휘문중학교의 우리 영어선생님입니다.

그러시고 우리 피겨의 제일 선배인 선구자이시죠.

그래서 이일 선생님도 일본에 유학을 가셔서 대학에 다니실 때 거기에서 스케이트를 이수를 해서 국내에 오셔서는 소위 삼청동, 지금 거기가 여름에는 풀장이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입니다.

지금 현재 감사원의 뒤뜰, 말하자면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서 거기다가 스케이트장으로 해서 겨울에는 조명까지 해서 거기서 야간에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아이스링크장이 있어서 들어가 보면 그렇게 안에는 춥지도 않고 또 얼음은 있고.

그래서 스케이팅 하기가 좋은데 그 당시에는 허허벌판에 운동장 같은 데 아까 같은 미나리밭에서 하시고 했으면 굉장히 추웠을 텐데 방한복도 요즘 같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스케이트에 아주 매력을 많이 가지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스케이트는 달리고 하니까 그런 추위 같은 것도 많이 잊을 수 있었죠.

그런데 이 피겨는 역시 그러한 과격하다는 것보다도 화려하고 또는 기술을 요하는 그런 종목이기 때문에 옥외에서 한다는 게 사실 어려운 종목입니다.

그래서 발전이 못 되다가 실내스케이트장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아까 미나리밭 말씀도 하셨는데 얼음을 한강이 아니면 운동장 같은 데 물을 가둬서 그걸 얼려서 그렇게도 했습니까?


-네.

그래서 겨울에 동대문스케이트장이 되기 전에 동대문운동장에 정구장이 있습니다.


-정구장에.


-정구장이요.

그걸 겨울에 물을 얼려서 스케이트장을 만들어서 야외인데 조금이라도 더 타려고 천장 하늘에다가 소위 말하자면 커튼을 친 겁니다.

커튼을 어떻게 세웠냐면 와이어를 매서 동대문운동장의 정문에 광고로 쓰던 폐물 광고물.


-현수막같이...


-현수막 쓴 거.

그걸 장장한테 얘기를 해서 그것을 빨래 너는 식으로 전부 하면 역시 응달이 져서 그만큼 다른 데는 다 햇빛에 녹아도 거기서는 그래도 한 2주 내지 3주는 더 탔어요.

그런 일도 있고요.

그 다음에 전국체전을 한다고 해서 소양강에 춘천에 가서 전국체전을 하러 갔는데 밤까지도 거기 가서 다 경기장에서 준비하고 들어와서 숙소에서 식사를 하고 잤는데 선발대로 갔던 사람이 배 띄웠다고 그런다고요.

스케이트장에 배가 다닌다 이거죠.

그러니까 배가 떴다고.


-그래서 결국에는 못 타시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냐면 그보다 더 상류로 올라가는 겁니다.


-더 위로.


-더 올라가야 추우니까.

그래서 소양강의 상류 우두강에서도 대회를 그쪽에 가서 한 일도 있고 심지어는 38선 접경에 그때 이한림 장군 같은 분이 육군단장 할 때 연천지역에서도 초청을 받아서 갔고.


-날씨가 더웠을 때 얼음이 녹거나 그랬을 때는 어떻게 경기 못 했겠네요.


-못 했죠.

또 추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야외에서 대회를 할 때 음악을 틀어야 되는데 요새 같은 시설이 아니고 옛날 소위 축음기죠, 포터블.

이걸 돌리는데 날이 추우니까 회전이 제대로 안 됩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되다가 날이 추우니까 웅웅~ 그야말로 슬로슬로로 도는 거죠.


-속도가 늦어져서.


-그래서 회전이 늦어지니까

할 수 없이 생각다 못해서 숯불을 밑에다가 축음기 밑에다가 놓고 조금 따뜻하게 해서 하면 조금 더 낫게 돌아가고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죠.


-정말 웃지 못할 일이었겠는데요.

그런데 스케이트가 해 보시니까 어떤 멋이 있던가요?


-그러니까 흔히 얘기하면 제가 스피드 타는 사람하고 항상 얘기를 하지만 스피드는 몇 바퀴 도는 것이 종목입니다.

400m 링크를 한 바퀴 조금 더 돌면 500m고 세 바퀴 돌면 1500이고.

다람쥐 쳇바퀴 돈다고 그러죠.

만날 똑같은 거니까.

그런데 피겨는 그야말로 점프해서 뛰고 또 스핀해서 돌고 또 그걸 연결해서 일련의 스텝으로 해서 했고 더군다나 거기에 음악에 맞춰서, 왈츠에 맞춰서 한다는 것이...

그래서 이 피겨는 원래가 러시아의 무용가인 잭슨 헤인즈라는 분이 미국 출신인데 오스트리아의 빈에 가서 소위 왈츠에 반해서 소위 스케이팅 왈츠를 착안해서 피겨를 시작했다는 걸로 돼 있습니다.


-정말 말씀을 듣고 보니까 멋도 있고 또 아주 다양한 그런 경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해정 선생님은 젊은 시절에 풍기문란으로 이렇게 잡혀가실 뻔한 적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건 무슨 얘기인가요?


-겨울이면 하계대회와 마찬가지로 동계에도 전국체전이 있습니다.

그랬을 때 청와대에서 그때는 경무대죠.

경무대에서 연락이 와서 내일 대통령 내외가 그 대회에 참가를 할 테니까 시범경기를 해 달라고 그렇게 연맹으로 연락이 왔던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이신가요?


-그랬는데 프란체스카 여사가 소위 피겨의 발상지인 오스트리아의 빈 출신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얘기하는 호주댁이 아니고 오지리댁입니다.

그래서 피겨를 아니까 한국에서 스케이트 전국체전을 한다니까 그래서 한강에 나오신다 그래서 그 전날 리허설 겸 한강에 가서 연습을 하러 일행들이 나갔던 거죠.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순찰중이던 경찰관이 대낮에 남녀가 붙들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으니까...


-손붙잡고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보고...


-생전 처음 본 거고 그러니까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갔더니 자꾸 연행을 원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를 데려가려면 내일 이만저만해서 대통령 내외 앞에서 내가 이걸 하게 돼 있으니까 데리고 가더라도 내일 데리고 가시라고 그랬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그래서 겨우 붙들려가는 연행하는 건 면하고.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것도 스포츠입니까 하고 가더라고요.


-처음이니까요.

그런데 그 다음 날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이시고 혹시 칭찬이라도 들으셨어요?


-그래서 전부 우리 피겨 관계자하고 대통령 내외분하고 기념촬영을 했는데 저는 그때 현역도 현역이지만 말단일까지 제가 다 맡아서 하다 보니까 뒤치다꺼리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저만 빼놓고 다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결국 주인공이 빠졌네요.

그렇지 않아도 사진을 보니까 여자선수는 있는데 이해정 선생님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총무일 보시고 뒷바라지하시느라고 찍히지는 못하셨는데요.

참 그 당시만 해도 한강에 그런 대회가 있으면 상당히 많은 관중들이 모였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관중 말씀하시니까 얘기인데요.

그 당시에 그런 모션이 개벽 이래 처음이자, 한국 사람이.

그러다 보니까 카메라맨들이 소위 좀 나은 작품을 찍으려고 그 찬 얼음바닥에 엎드려서 소위 전문용어입니까,

사진을 줌인으로 찍으려고 엎드려서 추운데.

그걸 하다 보면 사람들이 몰리니까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쿵쿵 하고.

그러면 도망가고 그런 광경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그런데 KTV 대한늬우스 영상에 그 당시의 한강대회 화면들이 많이 있거든요.

잠시 보신 다음에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한겨울.

서울의 한강은 3, 40일씩 결빙상태를 유지해 두껍게 언 강 위에서 수백명이 썰매를 타거나 스케이트를 타는 각종 빙상놀이가 가능했다.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모진 추위가 다가오자 한강 물도 얼어붙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젊은이들은 스케이팅에 앞을 다투고 있습니다.

1월 19일부터는 여기에서 전국 빙상경기대회도 열리는데 한강은 여름철에 수영장 못지않은 대성황입니다.

한편 스케이트장에서 좀 떨어진 얼음 위에서는 강태공들이 추위도 잊어버린 채 잉어낚시를 즐기고 있는데 겨울철의 잉어는 월등 그 맛이 좋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피겨스케이팅은 광복 후 여자 피겨선수들의 등장으로 활기를 띠게 되고 동계체전과 전국 피겨선수권대회를 통해 자리를 잡았다.

특히 남녀가 짝을 이루어 경기하는 페어스케이팅은 큰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한편 제2일에는 한강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피겨 및 스피드경기가 진행됐으며 오후 2시에는 이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장엄한 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경기에 들어가 특히 피겨의 묘기를 발휘한 조 양은 수많은 관중들의 박수갈채와 인기를 독점했습니다.

이날 대회장에 입석하신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는 각종 경기를 관람하시고 끊임없는 박수를 보내셨습니다.


-피겨 등 빙상경기에 대한 관심은 1959년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아이스쇼팀이 내한공연을 함으로써 열기를 더해갔다.


-늦은 여름철인 9월 초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꿈처럼 황홀한 빙상의 쇼가 벌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미국의 홀리데이 온 아이스쇼팀이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9월 9일부터 3주일 동안 중앙청 앞 광장에서 얼음의 무대를 만들어놓고 은반의 쇼를 베풀어 장안의 인기를 독점했습니다.


-이 공연을 계기로 당시 국내 여자피겨 챔피언이었던 조정근 선수는 홀리데이 온 아이스쇼단에 선발되며 한국 최초의 프로선수가 되기도 했다.


-그때 영상을 보니까 우리나라 빙상경기의 역사가 상당히 화려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세계 유수의 그런 빙상단들이 와서 우리나라에 찾아와서 공연도 하고.

아주 스포츠경기에 대한, 빙상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 같아요.


-미국의 홀리데이 온 아이스쇼단은 한국일보사가 초청을 했죠.

그랬는데 저것이 미 국무성 직속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문화사절단으로 해서 세계 각국에 거의 얼음을 모르는 나라.

저 아프리카라든지 이런 벽지를 다니면서 말하자면 공연을 하고 그런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번 우리나라에도 오고 나서 거기에 우리 한국 선수 하나 조정근이.

예명으로는 조천백자가 됐죠, 나중에.


-겨울철을 장식하는 체육의 대전.

제41회 전국체육대회 동계 빙상경기대회가 개막됐습니다.

이번 대회는 서울 시내 신설동에 새로 마련된 경기장과 서울운동장링크에서 벌어졌는데 남녀 5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해서 묘기를 다투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된 첫날 이 대통령 각하께서도 친히 서울운동장 경기장에 나오시어 피겨와 아이스하키 경기를 관람하셨습니다.

각하께서는 영하 18도의 혹한에도 불구하시고 한층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음 날에는 다시 신설동 스케이트장에 왕림하시어 근 1시간 동안이나 경기를 관람하시고 선수들에게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한강 같은 데서 많은 경기를 하다 보면 정말 구경삼아 구경꾼들이 많이 오고 하다 보면 한강이 얼었다 하더라도 얼음이 깨지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까?


-깨지지는 않아도 깨지는 소리 때문에 콩콩 중간에 가다가요, 꺼지고 그랬죠.

그래서 대통령 같은 분은 모래사장에다가 소위 좌석을 만들어놨으니까 그럴 염려는 없었고요.


-그런데 한강에서 벌어질 때 보니까 한강철교도 보이는 것 같은데 주로 한강 어느 지점에서 많이 하셨어요?


-그러니까 한강에서 철교, 지금 인도교 위 상류쪽이요, 거기고.

그 당시에도 한강은 철교나 인도교 밑은 얼지 않습니다.

차량이라든지 기차가 다니면서 진동이 되는 바람에 기둥 밑에는 얼지를 않기 때문에 거기는 출입을 못 하게 돼 있죠.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다 업니다.


-얼음판을 몇 바퀴 도는 것, 이런 건 아니지만 피겨스케이팅은 그래도 음악이 있어야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음악을 어디서, 대통령 앞에서도 할 때 음악은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할 때는 해군군악대를 동원을 시켰습니다.

소위 스케이팅 왈츠를 군악대가 연주해서 그때 시범경기를 했던 겁니다.


-1950년대 초반이고 하니까 정말 빙상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한데 피겨스케이팅, 특히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또 다리도 번쩍번쩍 들고 그런 모습을 보이고 했을 때 구경꾼들도 상당히 많이 모였을 것 같은데 여자 선수들 인기가 대단했죠, 그 당시에?


-그러니까 피겨는 남자 선수는 저보다 선배도 계시고 오랜 연륜을 가졌던 선배님들이 계셨지만 여자로서는 홍용명 선수가 그 당시에 중국 북경에서 귀국선을 타고 왔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으로 해방이 돼서 온 사람이죠.

겨울에 타는 걸 봐서 그 당시 블란서 대사했던 이수영 대사가 그 당시에 이화여고 영어선생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피겨를 탔어요.

그래서 여중에 피겨부가 창설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해방됨으로써 여자도 피겨를 탄 게 되죠.

그래서 대회를 한다고 하니까 중국에서는 대회 나갈 때 치마도 있고 유니폼도 있고 했는데 피난민이다 보니까 보는 눈은 있고 내일 대회를 한다니까 엄마를 졸라서 엄마 치마를 잘라서 말하자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회를 했던 겁니다.

그랬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풍기문란으로 해서 교장선생님한테 불려가서 훈계를 받았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피겨를 타는그런 선수들이 여자들이 주로 타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여자 선수들이 많지 않았잖아요.

특히 페어스케이트 같은 것은 짝을 지어서 같이 해야 하는데 그때 짝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서 더군다나 저희가 시범할 때도 그런 문제도 있었지만 학생의 신분으로 해서 남녀가 같이 페어를 한다고 하는 것 자체는 그 당시에 문교부에서 승인을 안 해 줬습니다.

그러니까 시범으로는 했고.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아이들은 할 수 없다고 그런 제재를 받은 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피겨의 제1호 선수가 홍용명 선수인데 그때도 그럼 덕수궁에서 이 선생님하고 만나셨나요?


-처음 만나본 건 덕수궁에서도 만났죠.

그때서부터 해서 지금 근 서로 왕래를 하고 스포츠를 같이 한 게 한 65년 됐죠.


-요즘에야 비디오도 있고 영상도 있고 하니까 많이 배울 텐데 그 당시에는 어떻게 빙상을 책으로 배우셨습니까?


-대개 일본 책이 그런 책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책에 나와 있는 그림 보고 사진 보고 흉내를 내다보니까.

그래서 페어스케이팅도 요새는 남녀만이 한 페어가 되게 돼 있지만 옛날 규정에는 남녀 또는 여자 여자, 남자 남자 이렇게 둘이 해도 되는 걸로 과거 규정에는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또 영상에서도 잠시 보였는데 영상에서 나왔던 조 양이라는 분이 미국의 아이스단에 뽑힌 첫 픽업된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선수인 거죠?


-그렇죠.

조정근이가 제일 먼저 가고 그 다음에 제가 68년도에 동계올림픽에 데려갔던 김애경이가 2호로 가고 그 다음에 세번째는 1호로 갔던 조정근이 동생 조혜근이가 또 가서 세 아이들이 그동안에 프로무대에 나갔었죠.


-참 오래된 일인데도 이름까지도 다 기억을 하시네요.

그런데 1940년대나 50년대 하면 스케이트는 정말 돈 있는 집 분들만 하는 그런 걸로 알고들 있고.

그런데 또 값도 비싸고, 스케이트가.

그래서 끈으로 묶어서 어깨에 딱 올리고 이렇게 다니고 그러셨지 않았어요?


-일부러 쇼를 하려고, 폼 재느라고, 뽐내려고 했죠.


-그런데 이해정 선생님이나 홍용명 선수는 전업선수는 솔직히 아니시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서울 약대를 전공하시고 약국을 운영하시고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피겨국제심판까지 따셨잖아요.


-실내스케이트장이 생기는 바람에 동계올림픽에도 참가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생긴 거죠.

흉내는 낼 수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선수 남자 이광영, 여자는 김혜경, 이현주 이렇게 셋을 데리고 그? 동계올림픽에 처음 우리나라에서는 참가를 했죠.

그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 우리 동대문스케이트장은 상당히 추워서 소위 냉장고에 들어가서  스케이트를 탈 정도였었고 거기를 가니까 연습을 하는데 선수가 오더니 더워서 스케이트를 못 타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그 당시에 남자 유니폼은 소위 요새 자동차정비사가 입고 하는 내리닫이식으로 하나로 전부 붙어 있는 지퍼가 있는 거, 그것이 그 당시에는 남자 유니폼이었었는데요.

지퍼를 쑥 내려보면 알몸뚱이인데 또 뭘 벗느냐고 이러한...

그러니까 그만큼 실내온도는 유지하면서 아주 환경이 그렇게 좋았던 거죠.


-그런데 솔직히 아까 스케이트 얘기가 나왔습니다마는 가격으로 따져도 굉장히 비쌌잖아요, 스케이트가.


-그러니까 그 당시에 스케이트보다도 피겨가 더 비쌌던 이유는 구두가 부츠입니다.

소위 요새식으로 높죠.


-구두가 높고.


-그러니까 국내에서 만드는 집도 없었지만 부츠기 때문에 구두값만 해도 더 비쌌죠.

그래서 동대문스케이트장이 오픈해서 선수를 하겠다고 스케이트는 타겠다고 하는데 스케이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내생산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맡겼더니 대장간에서 두들겨서 만드는데 하루에 생산량은 몇 개밖에 안 나오는데 구매자는 많고.

그래서 아주 홍역을 치렀습니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값이 비싸겠죠.

사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나라 빙상계 피겨가 발달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그 결과로 세계규모, 국제규모에 맞는 그런 빙상경기장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잠시 영상으로 그때 동대문스케이트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서울 동대문 밖에 거대한 실내스케이트장이 마련됐습니다.

이 실내스케이트장은 가로가 28m, 세로가 58m로서 국제규격에 맞는 링크로 되어 500여 명이 들어가도 불편이 없이 얼음을 탈 수 있으며 또한 이 스케이트장의 특징으로는 겨울철뿐만이 아니라 1년 내내 얼음을 탈 수 있어서 스케이터들의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1964년.

첫 실내스케이트장인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어 이곳에서는 빙상경기뿐만 아니라 계절에 상관없이 아이스카니발과 같은 은반의 향연도 펼쳐졌다.


-대한피겨연맹이 주최한 제4회 아이스카니발이 7월 29일과 30일 이틀 밤에 걸쳐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에서 열려 화려한 여름밤을 수놓았습니다.

무더위에는 아랑곳없이 베풀어진 은반의 항연은 선수마다 특이한 묘기를 벌여 선선한 장내를 더욱 시원하게 했으며 스피드에 액션을 곁들이며 은반을 난무하는 스케이트의 향연은 절찬을 받았습니다.

한편 시내 국민학교에서 선발된 꼬마선수들의 시범은 이채를 띄웠으며 특히 수성국민학교의 6살짜리 윤효진 양의 프리스케이팅은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영상을 보니까 꼬마선수들도 와서 참 기교 있게 잘 경기를 하던데.

우리나라 꼬마선수들의 피겨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요?


-그 당시에 6살 먹은 윤혜진 양 같은 경우는 전지훈련을 시키느라고 겨울철에 일본에 데려간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일본 피겨계에서 전부 걔 욕심이 나서 제각각 자기네들이 시도하겠다고 가지 말고 무료로라도 자기네들이 다 해 주겠다고 할 정도로 탐을 냈던 선수입니다, 걔가.

소질이 있었죠.

동대문스케이트장이 생겼으니까 그런 선수가 나온 거고.


-저런 실내경기장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많은 돈이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특별한 독지가가 있었습니까?


-사실은 대학 동창이 제가 권유를 해서 그 당시에 제가 빙상연맹 전무이사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일곱번째 성공이 된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 앞에서 스케이트장 하나 만들어달라고 졸라대고 했던 것이 여섯 번 바람을 맞고 일곱번째 처음으로 동대문스케이트장이 생긴 겁니다.


-그렇게 참 어려운 가운데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생기고 나니까 그동안 각지에 흩어져  있던 피겨스케이팅 하시는 분들이 한군데로 모이셨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거기 스케이트장의 배려로 해서 클럽에 라커룸도 별도로 만들어지고 해서 항상 거기 와서 모이고 스케이트도 타고...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에서도 아까 영상에도 보니까 카니발 그런 대회가 자주 열렸던 것 같아요.


-지금 아이스카니발은 동대문운동장 안에서 한번 했고요.

그 다음에 오프닝 행사로 해서 스케이트 타는 춘향전이라고 해서 저희가 행사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틀을 했는데 그야말로 대성황했었죠.

그러니까 스케이트장 주인으로서는 연예계통에 관계를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관중이 없을 때 관두는 거지 관중이 더 요구하는데 왜 계속 안 하느냐고, 돈 벌려고.

그렇지만 저희들은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틀 하고 말았죠.


-그런데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같은 경우 어려움도.

아까 돈도 많이 들어가고 또 롤러스케이트장으로도 변모도 하고 얼음도 얼려서 팔고 별 방법을 다 쓰셨는데 그런 실내경기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동계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1968년인가요.

프랑스의 그레노블대회 때 거기에 나가서 참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있었던 것 같아요.

좀 전해 주시죠.


-그 실내스케이트장이 생김으로써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최소한도의 기술이 습득이 된 거죠.

한 3년 합숙훈련까지 해서.

가서 보니까 최하위라도 주어진 과제는 그래도 6점 만점에 3점 정도.

반 정도, 50점 정도는 선수들이 다 받았습니다.

그랬는데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첫 번에 가서 이렇게 보니까 너무나 우리하고 거리하고 멀어요.

임원이나 선수들의 유니폼이나 또는 용복, 스케이트를 봐도 천지차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날은 숙소에 돌아와서 이게 우리 한국 사람이 이거 해도 되겠는가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랬는데 자고 일어나서 스케이트장에 나가니까 나도 저런 사람들하고 같은 1:1로 상대가 되니까 한번 해 봐야겠다 욕심도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갈 때 참 우리나라 선수들이 애먹은 것이 우선 아까 말씀드렸던 음악 같은 것도.

음악은 반드시 자기 본인들이 제작해서 제출하게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국내의 기술로서는 충무로에 있는 기쁜소리사가 제일 그래도 음악을, 편집을 잘 해 준다고 그래서 그동안 선수 아이들도 거기서 그걸 쓰고 올림픽 나갈 아이들도 거기다 놓고 가져가려고 그랬는데 도저히 마음이 안 내키더라고요.

그랬는데 그 당시 가기 직전에 세종문화회관이 오픈을 하려고 아직 준비중에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연줄로 해서 거기 음악기계가 좋은 게 들어왔다, 누가 귀띔을 해 주셔서 거기를 찾아가서 이만저만해서 우리가 이 음악을 편집을 해야 되는데 부탁을 했더니 응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가면 이거면 되겠지 하고 갔다가 음악을 사전에 제출을 했는데 메시지가 오잖아요, 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당신네가 제출한 음악 가지고는 도저히 이걸 틀 수가 없으니까 당신네들이 허락을 한다면 내가 오리지널판으로 해서 새로 만들어서 할 테니까 승낙해 주겠냐고.

그래서 속으로 얼마나 좋은지요.

그래서 승낙을 했더니 그 다음 날 연습하는데 하나 스페어를 갖다주더라고요.

이거 연습용이니까 연습할 때는 이거 틀라고, 그런 일도 있었고.

그다음에 그때 미국의 ABC가 경기를 독점해서 올림픽을 중계를 하는데 PD가 오더니내일 프리스케이팅에 여자가 입는 유니폼의 색깔은 뭐냐고 컬러북을 이렇게 보여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러한 다크한 것은 효과가 잘 안 나니까 이쪽의 환한 걸 입는 게 좋겠다고...

그런데 저희는 단벌신사입니다.


-가져간 옷이 없었죠.


-한 벌 가지고 갔는데 효과가 좋으니 나쁘니 상관 있어요.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그 옷 입고 나가서 경기하고 왔죠.


-사실 이해정 선생님 몇 년 전까지도 스케이트를 타셨고 지금은 안 타시겠지만 이렇게 지나고 보면, 과거를.

정말 주마등처럼 아주 화려했던 시절이 쭉 지나가셨을 텐데 우리나라 피겨의 역사의 원로로서 피겨계에 있는, 빙상계에 있는 분들이나 또 우리 후진들이나 또 우리 시청자들에게 이 기회에 모처럼 나오셨으니까 꼭 남기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한말씀 주시죠.


-저희들이 시작했을 때는 취미로 시작했던 거고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평생을 관여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마 저는 돈을 써야 되는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돈 없이는 안 되는 거고.

그런데 요새는 선수 은퇴를 해서 아마추어에서 스케이팅 발전이라든지 이런 데 협조도 했으면 좋은데 대개 프로페셔널이 됩니다.

그래서 프로코치로서 돈 벌러 나갑니다.

그러니까 실무하는 사람들이 거의 요새 드뭅니다.

그래서 아주 큰 어려움이 있죠.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피겨선수 중에서도 또 취미생활로 해서 직업으로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그런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고 그 다음에 남이 세계 챔피언이 됐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해서 치맛바람들이 대단합니다.

소질이 없어도 우리 자식이 제일이라고 다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한 사람만의 권유로 해서 시키지 마시고 여러 전문가의 평가를 받아서 진짜 소질이 있고 그 고생을 겪을 수 있는 그런 노력이 있는, 인내성 있는 그런 선수라야만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 명심하셔서 부모님들 요새는 실내스케이트장이 어느 고장 가도 우리나라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지도자가 없어서 오히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도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점을 유의하셔서 소질이 우선 있어야 되고 또 그걸 뒷받침해 줄 경제적인 환경도 돼야 되고 거기에 플러스 인내.

이런 것이 결합이 안 돼 가지고는 그 애는 우수한 선수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 후진들이 잘 새겨들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오늘 대한늬우스의 그때 그 사람은 한국 피겨 100년.

그 열정의 발자취를 한국 최초의 페어스케이팅 선수인 이해정 대한빙상경기연맹 고문을 모시고 나눠봤습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계의 큰 획을 그은 위대한 스타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 선배 스케이트 선수들의 땀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함께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저는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와주셔서 좋은 말씀 해 주신 이해정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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