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포성이 멎은지 벌써 60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국군포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는 500여 명으로 추산되는데요, 강필성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현장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80세가 넘은 노병의 군가.
{ 탈북 국군포로, 매주 모여 마음의 위안 얻어 }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패인 이들은 탈북 국군포로들로 탈북인들이 마련한 쉼터에 매주 모여 한 맺힌 세월을 공유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6.25전쟁 당시 수도사단 이등상사였던 이원삼씨는 전쟁포로가 됐던 60년 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원삼(88)/탈북 국군포로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하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됐는데...정전되기 이틀 전에 전투에서 포로가 됐단 말이야. 포로수용소에서 계속 포로 생활했지 뭐..."
국군포로라는 꼬리표 때문에 수용소와 탄광을 오가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는 이대봉씨는 북에서 한시도 고향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대봉(82) /탈북 국군포로
"30년간 갱내에서 죽지못해 살아가는 것이지. 성분이 나쁘니까 남한에선 성분 가르는 게 있소? 탈북해 내 고향 땅찾아 군복 입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죠."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된 국군의 수는 8만2000여 명
1994년 조창호 소위의 귀환 이후 최근까지 남측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80여 명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저를 꼭 한번 보기를 원하신다는 말을 하셨다고 조상사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1950년 10월 27일 평안북도 묘향산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된 뒤 연락이 끊긴 송인협 소위의 마지막 편지.
6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빛바랜 편지를, 동생 송인석씨는 매일 읽고 또 읽습니다.
평생 형을 기다리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송인석/서울 중계동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렇고 돌아가실 때도 형 유골이라도 찾아달라고 해서...
강필성 기자 kangps1@korea.kr
한 달 전 개설된 국군포로신고센터엔 현재까지 270여 건의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가족들은 국군포로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 생존 국군포로 500여 명…북한, 송환 거부 }
북에 생존한 것으로 추산되는 국군포로 수는 약 500여 명.
북한은 국군포로들이 스스로 북한에 남는 쪽을 택했다고 주장하며 송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제1차 남북국방장관 회담이후 지속적으로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으나 협의 자체가 어려운 상황.
{ 적십자회담서 상봉 추진…17명만 가족상봉 }
남북 적십자 회담에서 이산가족에 포함시켜 국군포로 가족 상봉을 추진해 17명의 국군포로 가족이 상봉했지만 더 이상 진전은 없었습니다.
국군포로 관련 민간단체들은 대부분 80이 넘는 고령이라는 문제의 시급성을 고려해 정부가 다양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그들의 귀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김현/ 국군포로신고센터 센터장.
"북한에 대해서 살아있는 국군포로 500명의 명단을 달라고 요구하고 얻으면 공지해서 가족들을 찾아야 합니다.서신을 하게하고 전화를 하게 해서 상봉하게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그분들을 송환해야 합니다.
{ 서독, '프라이카우프' 정책으로 전쟁포로 찾아 }
과거 우리와 상황이 비슷했던 서독은 통일 전 냉전시대에 민간단체를 앞세운 이른바 '프라이카우프'정책을 통해 동독 반체제 인사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미국 또한 국방부 산하에 포로실종자 사무국을 설치해 운영중입니다.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0년....
하지만 국군포로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습니다.
KTV 강필성입니다.
(KTV 한국정책방송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 ⓒ 한국정책방송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