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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경찰 60년···든든한 '바다지킴이'
등록일 :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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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리나라 해양경찰은 지난 1953년 창설된 이래 60년 세월을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며 바다의 안전을 책임져 왔는데요.

해양경찰의 역사를 강필성 기자가 돌아봤습니다.

[기사내용]

6.25 전쟁의 포성이 멈추고 전후 복구작업이 한창이던 1953년 12월 23일.

부산항에서는 해양경찰의 전신인 해양경찰대의 창설식이 열립니다.

박옥규 2대 해군참모총장은 이성주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에게 모형 닻을 전달합니다. 

해군이 현재의 경찰청인 내무부 치안국에 해안 경비 임무를 일부 넘긴다는 의미였습니다.

대한뉴스(1953년 12월 23일)

"지금까지 국방부에서 담당하던 우리나라 해안 경비를 대통령령에 의해서 일괄 담당하게된 해안경찰들..."

초기 해경의 임무는 우리 수역을 침범하는 외국 어선을 단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배타적 경제수역이 도입되기 전 이승만 정부는 일본과 중국과의 어업분쟁을 막기위해 1952년 평화선을 긋고 불법어업 활동을 단속하도록 해양경찰대를 창설했습니다.

'한국의 어업'/(문화영화, 1957년)

"또다시 일본과 중공 등이 우리의 해역을 침범해 와 대통령께서는 드디어 우리의 해양주권을 선언하는 평화선을 설정하고 국권을 선회함과 동시에 우리의 어업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1960년대 부산항의 모습입니다.

당시 대마도를 통한 밀수가 극성이었습니다.

대규모 밀수조직은 쾌속정까지 만들어 부산으로 일본 제품을 들여왔습니다.

해경은 해군과 합동수사반을 운영하며 이때부터 밀수 단속에도 나섰습니다.

'밀수합동수사반;(문화영화, 1966년)

"1965년 1월 19일부터 66년 1월 15일까지 밀수사범 검거 실적을 보면 총 검거 건수 2168건에다 검거인원이 2511명 압수금액이 3억

창설 당시 해경이 보유한 인력과 장비는 658명의 대원과 낡은 경비정 6척이 전부.

3면의 드넓은 바다를 지키기엔 장비나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1955년 견우호 대원 4명이 임무 수행중 중국에 납치되고 1960년엔 701정 대원 2명이 순직하기도 했습니다.

갈수록 해경의 역할이 커지자 정부는 1960년대 후반부터 해경의 장비와 인력을 보강해 나갑니다.

대한뉴스(1968년 8월 24일)

"바다를 지키는 해양경찰대의 경비정 9척이 새로 취역했습니다. 우리기술로 만든 이 쾌속정은 무게 100톤급 25노트의 최대시속을 낼 수 있으며 중포 1문 기관포 2문 중심직경 100마일의 범위를 탐지 하는 고성능 레이더가 장치돼 있습니다"

해경은 1979년 본대 청사를 부산에서 인천으로 확장해 옮긴 뒤 천톤급 대형 함정을 도입하고 일반 경찰서의 연안정 44척을 인계받는 등 조직이 대폭 확대됩니다.

1986년 해양경찰대장 직급이 치안감에서 치안정감으로 격상되고 1996년엔 해양수산부의 독립 외청으로 승격하며 경찰청과 분리돼 조직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현재 해경은 1만 명의 인원과 301척의 함정, 23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불법어업 단속부터  기름유출 방재작업까지 우리 바다를 지키기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KTV 강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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