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4만 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곳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인데요.
제96주년 3.1절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정신이 깃들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최영은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기사내용]
'대한독립만세'.
을사늑약 이후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을 외치던 독립운동가들.
일제는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들을 가둘 목적으로 1908년, 경성 감옥을 세웠습니다.
이후 1945년까지 우리 애국지사 4만여명이 수감됐던 이곳은 여전히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한 역사의 현장으로 복원됐습니다.
3.1운동을 펼친 유관순 열사는 1919년 8월, 이곳에 수감됐고 이듬해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구, 안창호, 이규창 등 수많은 애국지사 역시 이 곳에 끌려와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참혹했던 우리나라의 현실만큼 수용소는 싸늘했습니다.
한겨울에도 난방은커녕 두꺼운 옷 한 벌 갖추지 못한 채 갇혀야 했지만 뜨거운 독립의지로 수감생활을 견뎌냈습니다.
특히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규모가 점차 커지자 일제는 옥사 규모를 확대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새로 지은 12옥사에는 좁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른바 '먹방'이라 불리던 독방이 존재했습니다.
싱크> 유덕웅/ 서대문형무소 해설사
"한평도 안되는 작은 독방을 만들어서 수감시켰는데, 아마 일본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작은 독방을 설치해서 고통을 주려고 한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물고문, 손톱 찌르기, 바늘상자에 감금하기...
지하고문실은 더욱 참담했습니다.
현장멘트> 최영은 기자/michelle89@korea.kr
"벽에 서 있는 관이라는 뜻의 벽관입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고통을 주기 위한 고문 도구입니다."
취조 과정이라는 명목으로 이 같은 반인륜적인 고문이 연일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수없이 반복됐지만 일제는 잔인한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강수연 / 서울시 금천구
"좁고 답답하고 무서워요."
인터뷰> 박종빈 / 대구시 중구
"옛날 우리 선조들이 이런 고난을 당했던거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일제는 이 같은 목적의 대형 교도소를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세워나갔습니다.
당시 전국의 교도소는 모두 28곳.
우리나라 전역이 거대한 감옥과 다르지 않았던 겁니다.
이 같은 만행에 대해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는 광복 70주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양지연 / 광주시 서구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기 오니까 또 울컥하고, 화가납니다. 이런 것에 대해 일본은 우리가 납득할만한 사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국민이 납득할 만한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의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와 이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스탠딩> 최영은기자 michelle89@korea.kr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이곳에 수감된 수만명의 애국지사들.
그들이 흘린 피와 함성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KTV 최영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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