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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조선기술자…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다
등록일 :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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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독일 하면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하지만 당시 조선업 기술자들도 3백명이 파견됐고 그들도 국가경제를 살렸던 공로자라는 사실, 알고 계신 분들 많지 않으실 겁니다.

파독 선박 근로자였던 원용규 씨를 독일 함부르크에서 박경란 국민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독일 북부에 위치한 무역항 함부르크 지난 1971년 선박 기술자로 이곳에 온 원용규 씨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머리에 성성한 백발과 불편한 노구가 45년 독일 삶의 역경을 말해줍니다.

인터뷰> 원용규 (75세)/ 전 파독 선박기술자

"해방되고 양식이 없어서 영양실조에, 극심한 식량난을 겪은 나머지, 아버님이 시골에 가서 풀 뜯어먹어도 시골이 살기가 낫겠다 싶어서 이사를 가신 겁니다. 그래서 3년을 학교도 안보내더라고요."

원씨는 서독 파견 조선 기술자 1진으로 100여 명과 함께 돈을 벌기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원용규 (75세)/ 전 파독 선박기술자

"그 당시 해외개발공사에 공개한 신문을 보고 저의 직종은 배관공이었습니다. 2급 기능사. 거기에 지원해서 합격이 돼서, 나이 31살에 여기 왔습니다."

당시 원 씨에겐 아내와 아들 4형제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을 일으키고 선진 조선기술을 배워야겠다는 마음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년 동안 남편과 떨어져 한국에 남아 있던 아내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뷰> 정정금 / 원용규씨 부인

"4형제가 남자애들이라 쉬운 게 아니잖아요. 키워보면 아시지만, 그저 이리뛰고 저리뛰고 그런데다 할머니, 할아버지 계시지… 5년이란 세월이 너무 길었어요."

자신이 근무했던 선박회사 사무실과 흔적만 남은 컨테이너 수송열차를 보면서 배관공으로 억척스럽게 일을 했던 당시를 회상합니다.

인터뷰> 원용규 (75세)/ 전 파독 선박기술자

"물건을 들어가지고 뒷부분, 앞부분 그걸 해서 저기 가서 배에 얹어주면 그걸 가져다가 용접하고 조립하는 건 조선공이 하고 다른 파이프는 배관공이 하고 전 공장에 있었는데 그걸 헐었어요. 그 안에서 제작을 하고…"

3년 계약이 끝나갈 무렵 결핵이 걸린 원용규 씨는 7개월간 독일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이대로 병에 걸려 한국에 돌아갈 수 없어 노동청에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했고, 결국 엑스레이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인터뷰> 원용규 (75세)/ 전 파독 선박기술자

"취료비, 이 모든 걸 어떻게 감당하나… 이 걱정이 앞서는 거예요. 노동청에 가서 이런 손을 보이면서 내가 과거에 결핵으로 아팠지만 지금은 건강해서 가벼운 일을 해야겠다…"

원 씨는 선박 근로자로 퇴직한 후에도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번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 꼬박꼬박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인터뷰> 원용규 (75세)/ 전 파독 선박기술자

"그러면서도 그당시 우리 부모는 돈 없는 나라니깐 내가 붙이는 생활비, 그거 한 게 가장 큰 효도했다는 생각이에요."

가난했던 나라와 가족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의 조선업 발전에 작은 획을 그었던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져갑니다.

지금 그들은 발전한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 하면서 조국이 자신들을 기억해주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국민리포트 박경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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