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10년, 평화공존길
등록일 : 200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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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성과 가운데 가장 큰 진전이 있었던 분야를 든다면 아마, 남북관계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시기를 통해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평화와 공존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입니다.
연속기획으로 마련한‘IMF 그 후 10년’ 2일은 지난 10년 동안의 남북관계 발전과정을 살펴봅니다.
강석민 기자>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한의 하늘 길을 열었고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전 세계에 한반도의 평화정착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2007 남북정상선언에서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궁극적으로 종전선언을 통해 국제사회의 질서 속으로 편입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핵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전쟁을 종료해 경제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북․미관계를 개선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협력해나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북한의 이러한 의지는 2007 남북정상선언을 계기로 북핵 문제해결이 6자회담과 남북대화를 통해 상호 보완되는 선순환 구조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 핵실험 이후 6자회담이라는 틀 안에서 북미와 남북은 양자협상을 통해 6자회담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적 구조를 형성하게 됐습니다.
또한 눈여겨 볼 수 있는 점은 한반도 종전선언.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상황을 반영한 새로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김정일 위원장에게 설명하고 설득해 종전선언을 위한 남북간의 실질적 대화에 이르는 귀중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머잖아 3개국 또는 4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시대의 종언을 알리게 될 것입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첫 성과는 85년 9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방문입니다.
이때 우리측 이산가족 35명과 북측 이산가족 30명이 가족과 친척을 상봉했으며 이것이 이산가족 교류의 첫 신호탄이 됐습니다.
이후에도 이산가족 교류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지속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6.15 공동선언 채택을 계기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극적인 전환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분단 이후 지난 97년까지 45년간 이산가족 상봉자는 백쉰일곱명에 불과했지만 지난 10년간 이상가족 상봉자 수는 약 2만명으로 124배나 증가했습니다.
이같은 성과는 남북 모두 이산가족문제의 시급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고 조속히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2000년부터는 상봉시간과 개별상봉이 확대되어 질적으로도 변화했습니다.
상봉시간은 열한시간으로 85년에 비해 두배 이상 늘었고 참관상봉과 가족나들이, 만찬 등 다양한 상봉 형식이 추가됐으며 상봉방식 또한 대면상봉과 화상상봉, 서신교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 금강산 면회소가 완공되고 나면 상시상봉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은 성과는 국민의 정부 이후 정부의 인도적 사업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간 실질적인 교류의 근간임을 인식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 이후 남북관계의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하나는 민간교류가 눈에 띄게 늘어난 점입니다.
민간교류의 활성화는 그동안 남북을 오고간 인원을 살펴보면 그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97년 이전 2천9백여명이었던 왕래인원은 약 38만명으로 126배나 증가 했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는 이질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남북관계를 고려 할 때 분위기를 화해 무드로 전환하기 위해서 인도적인 지원과 교류가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민간교류의 활성화에 노력해 왔습니다.
그간 노력은 2007정상선언 이후 민간 교류에 대한 북한의 시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무책임한 대북 인식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이라는 일관된 기조를 발판으로 북핵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등 굵직굵직한 남북현안들을 해결하면서 한반도를 대결의 구도에서 평화 공존의 시대로 바꿔 놓았습니다.
(한국정책방송 KTV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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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시기를 통해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평화와 공존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입니다.
연속기획으로 마련한‘IMF 그 후 10년’ 2일은 지난 10년 동안의 남북관계 발전과정을 살펴봅니다.
강석민 기자>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한의 하늘 길을 열었고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전 세계에 한반도의 평화정착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2007 남북정상선언에서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궁극적으로 종전선언을 통해 국제사회의 질서 속으로 편입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핵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전쟁을 종료해 경제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북․미관계를 개선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협력해나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북한의 이러한 의지는 2007 남북정상선언을 계기로 북핵 문제해결이 6자회담과 남북대화를 통해 상호 보완되는 선순환 구조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 핵실험 이후 6자회담이라는 틀 안에서 북미와 남북은 양자협상을 통해 6자회담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적 구조를 형성하게 됐습니다.
또한 눈여겨 볼 수 있는 점은 한반도 종전선언.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상황을 반영한 새로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김정일 위원장에게 설명하고 설득해 종전선언을 위한 남북간의 실질적 대화에 이르는 귀중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머잖아 3개국 또는 4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시대의 종언을 알리게 될 것입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첫 성과는 85년 9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방문입니다.
이때 우리측 이산가족 35명과 북측 이산가족 30명이 가족과 친척을 상봉했으며 이것이 이산가족 교류의 첫 신호탄이 됐습니다.
이후에도 이산가족 교류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지속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6.15 공동선언 채택을 계기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극적인 전환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분단 이후 지난 97년까지 45년간 이산가족 상봉자는 백쉰일곱명에 불과했지만 지난 10년간 이상가족 상봉자 수는 약 2만명으로 124배나 증가했습니다.
이같은 성과는 남북 모두 이산가족문제의 시급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고 조속히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2000년부터는 상봉시간과 개별상봉이 확대되어 질적으로도 변화했습니다.
상봉시간은 열한시간으로 85년에 비해 두배 이상 늘었고 참관상봉과 가족나들이, 만찬 등 다양한 상봉 형식이 추가됐으며 상봉방식 또한 대면상봉과 화상상봉, 서신교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 금강산 면회소가 완공되고 나면 상시상봉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은 성과는 국민의 정부 이후 정부의 인도적 사업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간 실질적인 교류의 근간임을 인식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 이후 남북관계의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하나는 민간교류가 눈에 띄게 늘어난 점입니다.
민간교류의 활성화는 그동안 남북을 오고간 인원을 살펴보면 그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97년 이전 2천9백여명이었던 왕래인원은 약 38만명으로 126배나 증가 했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는 이질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남북관계를 고려 할 때 분위기를 화해 무드로 전환하기 위해서 인도적인 지원과 교류가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민간교류의 활성화에 노력해 왔습니다.
그간 노력은 2007정상선언 이후 민간 교류에 대한 북한의 시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무책임한 대북 인식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이라는 일관된 기조를 발판으로 북핵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등 굵직굵직한 남북현안들을 해결하면서 한반도를 대결의 구도에서 평화 공존의 시대로 바꿔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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