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추진역사`
등록일 : 200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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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은 역대 정권들 모두가 추진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반세기에 걸친 남북정상회담 추진 노력을 정리했습니다.
최고다 기자>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6월에 열렸지만 정상회담을 추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훨씬 이전인 박정희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5년 8월1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이 군사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을 추구한다면 직접 만나 통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정상회담에 운을 띄웠습니다.
1979년 1월 연두회견에선 이보다 한발 더 나가 “남북한 당국이 시기, 장소에 상관없이 만나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했으나 북한의 반응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 됐습니다.
정상회담 개최 노력은 5공화국 들어 보다 활발해졌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81년 1월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했고 그 후 거의 매년 국정연설,8·15 경축사 등을 통해 정상회담의 성사를 북측에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북방외교를 외교의 슬로건으로 내건 6공화국 노태우 정부는 정상회담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것도 이 때입니다.
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쓰며 김일성과 만날 뜻을 밝혔습니다.
또 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과정에서 양측이 막후에서 정상회담을 추진해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게 당시 핵심 관련자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하지만 군사정부의 이와 같은 노력은 대외적으로 공포에 그쳤을 뿐 회담을 위한 실무적 차원의 협력은 없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직전에 무산되기도 하는 질곡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문민정부의 계속된 회담제의에 당시 북한 김일성 주석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날 용의가 있다고 화답해 정상회담은 급물살을 탔습니다.
남과 북은 그해 6월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을 갖고 정상회담을 7월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하는 등 세부일정을 거의 확정지었지만, 7월 9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반세기 동안 꽁꽁 잠겨있던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는 결국 국민의 정부가 텄습니다.
재야시절부터 남북화해주의자로 유명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제사회에 고립 되 있던 북한에게 대북 원조, 상호 협력을 강조하는 햇볕정책을 폈고 마침내 2000년 6월 15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남과 북의 정상은 손을 맞잡았습니다.
하지만 한번 튼 물꼬는 더 시원하게 뚤 릴 것 같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등으로 국제사회의 여론이 악화됐고 남북관계도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국제사회의 여론을 주시하면서 북한을 국제사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일관된 노력을 펼쳤고 결국 남북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습니다.
(한국정책방송 KTV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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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반세기에 걸친 남북정상회담 추진 노력을 정리했습니다.
최고다 기자>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6월에 열렸지만 정상회담을 추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훨씬 이전인 박정희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5년 8월1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이 군사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을 추구한다면 직접 만나 통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정상회담에 운을 띄웠습니다.
1979년 1월 연두회견에선 이보다 한발 더 나가 “남북한 당국이 시기, 장소에 상관없이 만나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했으나 북한의 반응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 됐습니다.
정상회담 개최 노력은 5공화국 들어 보다 활발해졌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81년 1월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했고 그 후 거의 매년 국정연설,8·15 경축사 등을 통해 정상회담의 성사를 북측에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북방외교를 외교의 슬로건으로 내건 6공화국 노태우 정부는 정상회담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것도 이 때입니다.
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쓰며 김일성과 만날 뜻을 밝혔습니다.
또 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과정에서 양측이 막후에서 정상회담을 추진해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게 당시 핵심 관련자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하지만 군사정부의 이와 같은 노력은 대외적으로 공포에 그쳤을 뿐 회담을 위한 실무적 차원의 협력은 없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직전에 무산되기도 하는 질곡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문민정부의 계속된 회담제의에 당시 북한 김일성 주석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날 용의가 있다고 화답해 정상회담은 급물살을 탔습니다.
남과 북은 그해 6월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을 갖고 정상회담을 7월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하는 등 세부일정을 거의 확정지었지만, 7월 9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반세기 동안 꽁꽁 잠겨있던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는 결국 국민의 정부가 텄습니다.
재야시절부터 남북화해주의자로 유명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제사회에 고립 되 있던 북한에게 대북 원조, 상호 협력을 강조하는 햇볕정책을 폈고 마침내 2000년 6월 15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남과 북의 정상은 손을 맞잡았습니다.
하지만 한번 튼 물꼬는 더 시원하게 뚤 릴 것 같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등으로 국제사회의 여론이 악화됐고 남북관계도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국제사회의 여론을 주시하면서 북한을 국제사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일관된 노력을 펼쳤고 결국 남북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습니다.
(한국정책방송 KTV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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