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호권(80) /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故주창세의 아들
-故주창세(36)는 경성대학교 졸업후 서울에서 수협 조합장으로 근무하다 고향인 대술면 마전리에 내려와 지식인으로서 마을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한국전쟁 전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었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막내동생인 주용세(19)와 함께 대술지서로 불려가 구금돼 있다가 대술지서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 당시 8세였던 주호권은 아버지와 삼촌이 대술지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을 때 어머니가 도시락을 주며 면회를 다녀오라 하여 집을 나섰으나 동네 길목에서 사람들을 구타하는 소리에 무서워서 다시 집으로 도망쳐 온 기억이 있다.
조옥형(89) / 부역혐의 희생자 故조병언의 아들
故조병언(44)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 후 예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고 학원을 세워 교육에도 힘쓰며 예산 최초로 과수농업을 시작하기도 한 인물이다. 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으로 예비검속되었다가 풀려났는데 이후 잡히지 않아 예산군 인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수복 후 월북을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치안대에 잡혀 1950년 11월 20일 신양면 대덕리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 고향마을은 대흥면 선지리였는데 부친이 잡힌 줄도 모르고 있다가 신양면에 살고 있던 부친 친구분이 알려줘서 치안대에 잡힌 이야기와 정확한 총살 장소와 날짜를 알게 되었다.
조도형(78)/ 부역혐의 희생자 故조병만의 아들
故조병만(25)은 고향 응봉면 입춘리에서 농사만 짓던 순박한 농민이었다. 그의 형 조병호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하다 해방 후 노동당 응봉위원장 등을 역임한 좌익활동가로 수복 후 응봉면 치안대가 1순위로 찾아다녔는데 그를 찾을 수 없자 동생인 조병만을 볼모로 끌고 가 응봉지서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 아버지가 끌려 갈 때 할아버지가 “죄 없는 내 아들 잡아가려면 나도 잡아가라”고 항변하시다 함께 잡혀가 총살되었다.
김금희(81)/ 부역혐의 희생자 故김봉섭의 딸
故김봉섭(30대 추정)은 삽교면 영리에서 농사만 짓고 살았는데 북한군점령기, 동네사람들에게 떠밀려 마을 인민위원장을 맡았고 이 일로 치안대에게 잡혀가 예산역 인근에 있던 농협창고에 구금돼 있다가 무한천 다리 밑 개울가에서 집단 총살되었다.
# 아버지가 치안대에 끌려갈 때 6세였던 딸 김금희는 치안대에게 다리를 걷어차여 뼈가 부러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는데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불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구금된 아버지 면회를 다니다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총살당했으니 다친 딸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신장호(75) / 부역혐의 희생자 故신흥식의 조카이자 양자
故신흥식(29)은 전국을 돌며 장사를 해 돈을 좀 모은 후 고향인 광시면 운산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북한군 점령기 위협에 의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가 수복 후 광시지서로 잡혀가 그 앞 하천 모래사장에서 총살되었다.
# 신흥식의 조카인 신장호에 의하면 신흥식 백부가 끌려가기 전, 외삼촌이 먼저 끌려가 같은 장소에서 총살되었으며, 신장호의 어머니 안정순은 북한군점령기 여맹위원장을 맡았는데 광시지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덕망이 높았으므로 구명 운동으로 풀려났다.
조한태(80) / 부역혐의 희생자 故조한원의 동생
광시면은 한국전쟁 시기 피해가 가정 컸던 지역 중 한 곳으로, 현 예당저수지 상류에 해당되는 하천변은 예산에서 가장 큰 민간인 집단 학살지다.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 곳곳이 모두 집단학살지였으며 故조한원(23)의 고향인 광시면 대리는 좌익세가 강하고 신분갈등이 극심했던 지역으로 수복 후 피해가 가장 컸던 마을로 꼽힌다.
# 故조한원의 동생 조한태에 의하면, 큰형님인 조한원은 충주에서 광업소에 근무하다 전쟁이 나자 고향에 왔는데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갔다가 도망쳐 수복 후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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