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판주(83) / 산동면 희생자 故홍택주의 동생
- 故홍택주(19)는 구례중학교 1회 졸업생으로 서울로 진학하려다 계엄때문에 못가고 집에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끌려가 꽃쟁이재에서 총살되었다.
# 당시 9세였던 동생 홍판주는 군인들이 아침일찍 집으로 들이닥쳐 형님을 끌어내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바로 뒷집이 좌익세력 본부 같은 곳이었어서 그집 잡으러 왔다가 마을 청년들을 죄다 잡아간 것이다.
문종기(83) / 산동면 희생자 故문영권의 아들
- 故문영권(30대)은 12연대장 백인기의 사후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원천국민학교에 소집되었다가 큰딸 故문복순(10대)과 함께 고치판매소에 한달여 구금돼 있었고 1948년 12월 20일. 꽃쟁이재에 끌려가 총살되었으며 큰딸 故문복순도 보름 뒤 같은 곳에서 총살되었다.
# 문영권의 아들 문종기는 당시 8세였고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셋째누님과 본인과 어린 여동생은 할머니 품에 안겨 집에 남았고 나머지 가족들이 끌려갔다가 어머니와 둘째 누님은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아버지와 큰누님이 고치판매소로 끌려가 구금되었다.
신영식(76) / 간전면 희생자 故신종우의 아들
- 故신종우(41)는 1948년 11월 24일 군인들에 의해 간문초등학교로 연행된 후 간문천변에서 잡혀간 이들과 함께 사살되었다.
# 당시 2세였던 아들 신영식은 자라면서 아버지 희생사연과 여순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마을어른들로부터 하도 이야기를 들어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한다. 그에 따르면 진압군이 구례로 들어와 토벌작전을 펼친다 하자 마을 어른들, 특히 남자들은 대부분 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여수에서부터 민간인을 많이 죽인다고 소문이 나서 다들 몸을 피한 거다.
이춘희(74) / 마산면 희생자 故이상인의 아들
- 故이상인(20대)은 여순사건 발발 이후 남자들 대부분이 그랬듯 진압군을 피해 몸을 숨겼는데 어느날 새벽에 들이닥친 경찰들에 의해 그의 어머니 故장조예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으며 그 후 이상인은 낮에는 산에 숨어 있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49년 4월 경, 밤에 경찰이 들이닥쳐 잡아간 후 마산리 청천초등학교에서 총살하였다.
# 아들 이춘희는 할머니와 아버지 얼굴도 모르며 가족과 마을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
# 아버지는 여순사건 나고 집 마루 밑에 토굴을 파 거기 숨어 계셨다고 한다. 경찰들이 와 아버지를 찾으며 할머니를 구타하고 사살시켰을 때 아버지는 토굴에 계셨기에 그 소리를 다 들었고 경찰들이 간 후 할머니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모셨다고 한다.
최삼규(82) / 문척면 희생자 故최재규의 동생
- 故최재규(24)는 구례경찰서에 구금 중이던 1948년 11월 19일 구례경찰서를 반군이 습격하자 군경이 최재규를 포함 수감된 인원들을 모두 사살한 후 구례읍 봉성산에 묻었다.
# 당시 8세였던 동생 최삼규는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총소리를 신호로 마을 사람들을
마을회관 공터에 집합시켰다는 것과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어린 자신만 집에 숨어있었다는걸 기억한다.
# 부모님이 돌아와 하시는 말씀이 노약자는 모두 돌려보내고 젊은 남자들을 다 데리고 갔다고 하면서 지능이 약간 모자랐던 둘째 형님만 돌려보냈다고 한다.
유엽(94)/토지면 희생자 故유형규의동생
- 故유형규(36)는 1949년 봄, 반군의 짐을 운반해줬는데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 연행해 갔고 이후 행방불명되었는데 며칠 후 섬진강변 양정지구에서 총살된 사실이 규명되었다.
# 사건 당시 20세였던 유엽은 현재 94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 때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 당시 토지면 오미리에는 반군이 자주 나타나 주민들에게 짐을 운반하라고 시키는 일이 많았다. 봄에 형과 이낙호 유형윤 등의 마을청년들이 산으로 식량을 운반했는데 누군가 이를 고발했는지 경찰이 알게 되어 구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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