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및 사건 개요>
지금으로부터 93년 전,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의 흔적을 찾아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고 이재실(당시 목포상업학교 2학년)씨의 아들 이광림씨와 함께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항일운동의 흔적을 하나씩 짚어가본다. 당시 목포는 1897년 개항 이래 식민지 수탈과 침략의 교두보이자 동시에 저항의 거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식민지 침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등 다양한 상업시설이 들어섰던 목포에는 호남과 제주 일대 수재들이 모두 모이는 목포상업학교가 1920년 개교한 이래 운영되고 있었다. 목포상업학교는 특히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재학하는 한일(韓日)공학으로서 식민지 차별교육에 분노를 느낀 조선인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그 어느 곳 보다 뜨거운 곳이었고 학생들은 독서회를 중심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동맹휴교 및 항일 시위에 앞장서 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한일 학생간의 갈등이 항일운동으로 분출되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던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 반대 시위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로부터 2주 뒤 무렵인 11월 19일,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목포 송도 신사와 정림여학교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그 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으로 전파시키는 불꽃 역할을 하게 되며, 훗날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운동 중 가장 진보적인 학생운동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백성문 변호사의 리드로 93년전 일제 강점기 시대, 목포 상업학교 학생 이재실씨의 흔적을 찾아 목포 교남동, 목포 신간회 자리 등을 찾아가며 당시 청년 학생들이 꿈꾸었던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겨우 17세, 18세밖에 되지 않았던 학생들이 경찰과 학교 당국의 감시를 피해 항일 시위에 나서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통치기에 벌어졌던 식민지 교육의 본질을 살펴보고, ‘충량한 신민’을 양성코자 했던 일제에 저항하여 광주와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이 벌였던 운동의 과정을 MZ 세대 패널들과 함께 따라가며 일제강점기 조선 학생들이 느꼈던 울분과 독립에 대한 열망에 대해 공감대를 모아가본다. 나아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유일당이었던 신간회의 지원 아래서 당시 목포상업학교 학생운동이 다른 학생운동과 다른 대담하고 진취적이었던 부분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설명을 통해 그 의의를 평가해본다.
<클로징>
항일학생운동 참여로 이재실씨는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한 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 된다.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밀항을 선택하여 일본 아자부수의축산학교에서 조선유학생 동지회 활동을 하며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일제강점기 문화통치기에 일어난 광주, 목포 학생들의 항일투쟁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을 짚어보며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정권에 따라 기념사업과 교육사업이 축소되기도 하고 정상화되기를 반복해온 아픈 역사를 되돌아본다.
나아가 지금이라도 전국 320개 학교 540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던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대해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떠올랐던 1929년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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