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및 사건 개요>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은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에 대해 국가변란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대한민국 헌정사상 사법살인 1호로 기록된 사건이다. 한때 조선공산당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조봉암은 해방 이후 박헌영을 비판하며 전향한 뒤 국회의원에 출마, 제헌의회 의원이자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 부의장으로 활약한 정치가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던 그는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958년 총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전격 체포됐다. ‘평화통일론’ 주장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김일성의 자금을 받아 사용한 간첩죄가 혐의였다. 재판과정에서 육군특무대의 민간인 불법감금수사 사실이 밝혀지고 핵심증인인 양이섭이 진술을 번복했음에도 대법에서 최종적으로 사형이 확정됐고, 재심 청구가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이례적인 사형집행 단행에 대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자신에게 위협적인 정적을 제거한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나왔는데, 당시 국무회의 비망록에서 이승만이 조봉암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이 이 사건이 정치적 탄압 사건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사형집행 후 망우리 묘지에 봉분과 비석도 없이 장례를 치러야 했던 유가족들은 이후 사형수 가족으로 경찰 감시의 눈초리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1991년 국회의원 86명이 조봉암의 사면복권 청원에 이어 2006년 딸 조호정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재조사 신청서를 냈고 2007년 진화위는 진보당 사건이 '정치 탄압'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죽산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도록 권고했다. 그리고 2010년 진보당 사건의 재심이 열려 마침내 2011년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공식적으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 52년 만에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이다.
현재 망우리 조봉암 묘에 서있는 비석의 뒷면은 텅 비어있다. 그의 묘비가 ‘백비’가 된 사연은 무엇일까? 이같은 궁금증과 함께 백성문 변호사가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선 이름인 ‘조봉암’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헌의회 의원, 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장관이자 대통령후보였던 인물이 사형수가 된 사연에 대해 당시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에서 활동했던 간부 이명하 씨의 아들로 시신 수습 당시 아버지를 따라가 조봉암의 마지막 모습을 봤던 이모세 조봉암기념사업회 회장, 유족대표인 조봉암의 손녀사위 유수현 씨, 그리고 재심 당시 변호인단이었던 김필성 변호사 등 관련인물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들어본다. 또한 ‘평화통일’과 ‘간첩’이 당시 어떤 의미였는지, 한국전쟁 직후 1950년대 한국사회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 속에서 ‘사법살인’으로 치닫게 된 정치탄압과 인권유린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왜 중요한지 짚어본다.
<클로징>
그간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이름, 잊혀진 이름이었던 조봉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그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개인의 명예회복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또한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인 독립유공자 서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해 환기를 시키면서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그날에 대한 소망으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한다.
( KTV 국민방송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 ⓒ 한국정책방송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