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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청산
등록일 : 2007.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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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첫 날입니다만, 20년 전 6월은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습니다.

이땅에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이끈 뜨거운 함성이 있었습니다.

6월항쟁 기획시리즈 그 첫번째 시간으로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봤습니다.

최고다 기자>

1987년 1월의 차가운 겨울은 민주화의 불씨를 품은 채 뜨겁게 시작됐습니다.

5공화국 말,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의 바람이 그 어느 때 보다 거세질 무렵,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로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정권의 부도덕성은 국민들의 가슴에 민주화란 염원의 불을 당겼고, 민주세력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하나의 목표로 똘똘 뭉치게 됩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당시 정권은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 불가라는 호헌을 선언했고, 이에 맞선 직선제개헌 여론은 학생뿐만이 아닌 교수, 예술인, 시민단체 등까지 확산됐습니다.

정부와 민주화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 해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라는 거대한 폭탄의 뇌관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6월 10일부터 19일간 전국은 ‘독재타도’, ‘직선제쟁취’라는 구호로 뒤덮였고, 지식인과 대학생뿐만이 아닌 넥타이부대, 아줌마부대, 심지어는 중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결국 당시 정권은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양보하기에 이릅니다.

넥타이부대의 가세로 유명한 6월 항쟁.

87년 6월의 민주화운동은 분명 그 이전의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과거의 민주화 운동이 지식인 계층의 선도적이고 계몽적이었던 모습이었던 반면, 6월 항쟁은 일반 국민이 주체가 된 민중운동의 전형이었습니다.

국민이 주체된 6월 항쟁.

유구한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 6월 항쟁이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국민의 힘으로 일궈낸 민주화는 이념과 성향을 달리하는 그 어떤 정치 세력에게도 과거 권위주의로의 회귀를 허락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사회 구석구석 오랜 기간 동안 내제 되있던 권위주의를 청산하는데 혁명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대통령이 스스로의 권력을 포기하기도 하고, 족벌식 경영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던 재벌들도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수 없었습니다.

6월 항쟁은 이끌어 낸 것은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라는 선거제도의 변환이 아닌,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큰 흐름중인 하나였던 권위주의 대신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의식을 성장하게 페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최근 대학생 10명중 6명은 6월항쟁이 뭔지 모른다는 한 인터넷매체의 설문조사가 말해주듯, 시간은 흘러 6월 항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고, 이제 역사 교과서의 한 페이지만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6월 항쟁이 이 땅에 뿌려놓은 민주주의의 씨앗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한국정책방송 KTV 위성방송 ch164, www.ktv.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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