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1976)
등록일 : 2024.10.1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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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歌王) 조용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곡이 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처음 곡이 만들어졌을 때는 평범한 사랑노래였지만, 당시 한창 진행되던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사업과 맞물리도록 가사를 바꾸었다. 그리고 무명이었던 조용필을 단번에 스타로 만들었다. 과연 바뀐 가사는 무엇일까? 바뀐 가사 구절은 동시대를 살아가던 한국인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을까?
# 오프닝, 노래 소개
- 고정패널 김장실, 하재근, 특별출연 풍금 소개
- 가왕 조용필을 만든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
# 원곡 <돌아와요 충무항에>
- 처음 노래가 발표된 건 1970년. 작곡가 황선우가 통영 출신 가수 지망생 김해일에게 곡을 주면서 통영의 옛 이름 충무가 제목이 되어 발표.
- 지금과 다른 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에(1970)> 노래 비교
#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사고, 대연각호텔 (1971.12.29.)
- 대연각호텔에서 투숙하다가 화재 사건으로 사망한 가수 김해일(24).
- 당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았던 빌딩. 지상 21층, 지하 2층 규모. 고급 호텔이기에 국가 행사의 연회장이나 회의장으로 자주 사용. 하지만 목재와 한지를 사용한 인테리어임에도 화재시 비상 대책이 전혀 없었던 상황. 호텔 안에 머물고 있던 300여 명 중 사망자만 166명에 달하는 참사.
# 조용필에게 전해진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2)>
- 작곡가 황선우가 조용필, 김석일 등 여러 가수에게 노래 전달. 이후 제목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다시 변경.
- 김석일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2)> 노래 비교
- 당시 조용필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였으나, 밴드 보컬이 입대하자 보컬로 전향. 데뷔 음반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던 무명가수였음.
- 매니저이던 이회택, 작곡가이자 기획자인 안치행과 함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를 리메이크해서 앨범에 다시 취입.
# 밀리언셀러의 시작이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
- 각 방송사의 가요차트와 신청곡 횟수 1위. 77년 말에는 추산 음반판매량 40만 장 기록. 80년에는 음반판매량 100만 장 돌파. 94년에는 조용필의 모든 앨범을 합해 1천만 장 돌파.
- 대만 가수 등려군과 일본 엔카의 여왕인 미소라 히바리도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가 히트한 배경
1)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사업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며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초청, 발전한 대한민국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줌.
2) 가요 정화 운동
청년문화가 생겨나며 트로트의 인기가 한풀 꺾일 즈음 시작된 가요 정화 운동. 록, 포크 음악을 하던 대표 가수들(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이 대마초 흡연으로 처벌받아 가요계가 초토화 됨. 이후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주가 된 록트로트가 흥행하기 시작.
# 가왕이 탄생하기까지
- 조용필 역시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 자의반 타의반 은퇴 선언. 하지만 그 이후 노래 연습에 전념, 다시 가왕의 자리에 등극
# 오프닝, 노래 소개
- 고정패널 김장실, 하재근, 특별출연 풍금 소개
- 가왕 조용필을 만든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
# 원곡 <돌아와요 충무항에>
- 처음 노래가 발표된 건 1970년. 작곡가 황선우가 통영 출신 가수 지망생 김해일에게 곡을 주면서 통영의 옛 이름 충무가 제목이 되어 발표.
- 지금과 다른 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에(1970)> 노래 비교
#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사고, 대연각호텔 (1971.12.29.)
- 대연각호텔에서 투숙하다가 화재 사건으로 사망한 가수 김해일(24).
- 당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았던 빌딩. 지상 21층, 지하 2층 규모. 고급 호텔이기에 국가 행사의 연회장이나 회의장으로 자주 사용. 하지만 목재와 한지를 사용한 인테리어임에도 화재시 비상 대책이 전혀 없었던 상황. 호텔 안에 머물고 있던 300여 명 중 사망자만 166명에 달하는 참사.
# 조용필에게 전해진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2)>
- 작곡가 황선우가 조용필, 김석일 등 여러 가수에게 노래 전달. 이후 제목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다시 변경.
- 김석일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2)> 노래 비교
- 당시 조용필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였으나, 밴드 보컬이 입대하자 보컬로 전향. 데뷔 음반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던 무명가수였음.
- 매니저이던 이회택, 작곡가이자 기획자인 안치행과 함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를 리메이크해서 앨범에 다시 취입.
# 밀리언셀러의 시작이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
- 각 방송사의 가요차트와 신청곡 횟수 1위. 77년 말에는 추산 음반판매량 40만 장 기록. 80년에는 음반판매량 100만 장 돌파. 94년에는 조용필의 모든 앨범을 합해 1천만 장 돌파.
- 대만 가수 등려군과 일본 엔카의 여왕인 미소라 히바리도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가 히트한 배경
1)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사업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며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초청, 발전한 대한민국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줌.
2) 가요 정화 운동
청년문화가 생겨나며 트로트의 인기가 한풀 꺾일 즈음 시작된 가요 정화 운동. 록, 포크 음악을 하던 대표 가수들(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이 대마초 흡연으로 처벌받아 가요계가 초토화 됨. 이후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주가 된 록트로트가 흥행하기 시작.
# 가왕이 탄생하기까지
- 조용필 역시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 자의반 타의반 은퇴 선언. 하지만 그 이후 노래 연습에 전념, 다시 가왕의 자리에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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